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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마케터로 살아남기

마케터의 덕목 중 으뜸은

'마케터가 되려면 어떤 자격증을 따야 하나요?'
'좋은 마케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4~5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식의 질문을 받을 때면, 나름의 생각을 빼곡히 적어 정성스레 답을 주곤 했다. 지금도 누가 묻는다면 답이야 해주겠지만, 솔직히 그때만큼 써 내려갈 자신은 없다. 무엇인가가 그때보다 식어버렸다기보다, 당시 내가 내린 답이 적어도 지금은 정답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려서다. 만약 지금 있는 B2B SaaS 스타트업씬 마케터가 되기 위한 기초 스킬 셋을 묻는다면 종이 2~3페이지로도 부족하겠지만, ‘좋은 마케터'가 되기 위한 답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뭐가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나 좋은지, 하나씩 정의 내려야 할 생각을 하자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당장 '마케터에게 꼭 필요한 덕목‘을 하나만 꼽으라고 묻는다면 나름의 해답을 건넬 순 있겠다.

 

'관점이 이동이 자연스러운가'

일을 하다 보면 상대의 입장에 서야 할 때가 많다. 연차의 높낮이에 상관없다곤 하지만, 으레 연차가 올라갈수록 그 빈도수는 더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고객의 입장, 회사 대표님의 입장, 임원진의 입장, 하다못해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상대방의 입장이나 팀원의 입장에 서 생각할 때가 그렇다. 보통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했을까'식의 자문으로 시작하곤 하는데,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올 적엔 상대방의 위치로 발을 옮겨서고 나서야 조금은 이해의 실마리가 잡힐 때가 있다. 
 
관점의 움직임이 유려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절대적인 '정보의 양'이 많아야 한다. 여기서 정보는 상대방에게 직접 얻거나 눈치껏 읽을 수 있는 객관적 정보와 배경 조사를 통해 수집할 수 있는 간접적 정보까지 포함하면 더욱 좋다. 자사의 매체 광고를 주로 소비하는 고객을 프로파일링 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매체 어드민을 뜯어 방대양 양의 빅데이터를 수집해야 하듯, 감히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만큼의 보이지 않는 정보가 필요한 건 당연한 이치다. 단, 이때 정보 수집을 위해 상대방의 SNS를 하나씩 탈탈 털라는 얘기가 아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놓친 게 있는지, 혹은 상대마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내가 읽을 수 있던 물리적 증거는 어떤 게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는 정도다. 이렇게 데이터, 즉 아직 자료 단위의 Raw Data가 수집되면 그 안에서 정보를 추려야 한다. 주의할 점은 이 모든 과정이 보통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연소시킨다는 점이다. 그 때문인지 타인의 눈치를 많이 의식하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유독 피곤해하는지도 모르겠다.

웃픈 이야기지만, 지금 내 눈치의 8할은 이전 회사의 대표님 덕이 크다. 당시 그 대표님은 과거 국내 굴지의 종합 광고 회사에 다녔다는 자부심과 크리에이티브로 충만하신 분이었다. 문제는 보통 실무도 매니징도 아닌 그 사이 어디 즈음에서 피드백을 주곤 하셔서, 의사결정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거나 애써 며칠을 밤새 만든 제안서가 피티 당일 새벽 5시에 갈아엎어질 수 있다는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당면한 제안 피티의 수주가 가장 큰 목표였지만, 당시 그 외의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운 단 하나의 목표는 ‘생존’으로 기억한다. 집에 가고 싶었고, 제때 밥을 먹고 싶었고, 며칠째 자는 모습만 봤던 고양이도 쓰다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당시의 대표님 머릿속에 나도 들어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그때까지 내가 스스로 세웠던 관습과 룰을 거의 모두 헤집어야 했다. 그렇게 거진 2년간은 ‘대체 저 인간이 원하는 건 뭘까’라는 대범주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다해보니, 나름 관점의 이동을 위한 정보 수집 과정이 더 유려해진 것 같다. 아직도 주변에선 스스로 강해진 것뿐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난 당시 대표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난 어땠을까 하는 위기의식이 차오르곤 한다.